모가미급 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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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가미급 중순양함은 1930년대 일본 해군이 건조한 중순양함으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제한을 회피하기 위해 경순양함으로 위장하여 건조되었다. 15.5cm 3연장 주포를 탑재했으나, 20.3cm 연장포로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총 4척이 건조되었으며, 도모즈루 사건과 제4함대 사건을 겪으며 개장을 거쳤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 미드웨이 해전, 솔로몬 제도 해전 등에 참여했으나, 4척 모두 전쟁에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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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가미급 중순양함 - 스즈야 (모가미급 중순양함)
스즈야는 일본 해군의 모가미급 중순양함 4번함으로, 주포 교체 및 대공포와 레이더 증설 개장을 거쳐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나 1944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침몰했다.
모가미급 중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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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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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급 명칭 | 모가미급 |
함종 | 중순양함 |
건조 기간 | 1931년–1937년 |
취역 기간 | 1935년–1944년 |
총 완공 함선 수 | 4척 |
총 손실 함선 수 | 4척 |
이전 함급 | 다카오급 |
다음 함급 | 톤급 |
건조 | |
건조 조선소 | 구레 해군 공창 미쓰비시 조선소, 나가사키 요코스카 해군 공창 가와사키 조선소, 고베 |
비용 | (정보 없음) |
제원 | |
배수량 | 8,500톤 (기준 배수량, 보고된 수치) 10,980톤 (만재 배수량) 약 11,000톤 (기준 배수량, 실제 배수량) |
폭 | (모가미급) (스즈야급) |
동력 | 8–10 × 가마폰 보일러 |
추진 | 4축; 4 × 기어드 증기 터빈 |
항속 거리 | at |
승조원 | 850명 |
무장 (초기) | |
주포 | 5 × 3연장 15.5 cm/60 3년식 포 (1939년부터 5 × 2연장 20.3 cm/50 3년식 2호 포로 교체) |
대공포 | 4 × 2연장 포 |
기관포 | 4 × 단장 AA 포 |
어뢰 발사관 | 4 × 3연장 어뢰 발사관 |
장갑 | |
항공기 | |
탑재 항공기 | 3 × 아이치 E13A 수상기 |
함선 목록 | |
함선 목록 |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구마노 |
기타 |
2. 계획
1931년 함대 보충 계획을 위해, 일본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순양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모가미'급은 5문의 3연장 포탑에 155mm 주포(일본 최초)를 탑재하기로 결정했으며, 55°의 앙각을 통해 고각포(DP) 주포를 갖춘 몇 안 되는 순양함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재장전 가능한 포탑식 어뢰 발사기와 매우 강력한 대공전 방어력과 결합되었는데, 이 또한 일본 해군만의 특징이었다.[1]
1931년, 일본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순양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모가미'급은 5문의 3연장 포탑에 155mm 주포를 탑재하기로 했다. 이는 일본 최초였으며, 55°의 앙각을 통해 고각포 (DP) 주포를 갖춘 몇 안 되는 순양함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재장전 가능한 포탑식 어뢰 발사기와 강력한 대공전 방어력을 갖추었는데, 이 역시 일본 해군만의 특징이었다.[1]
중량을 줄이고 횡방향 안정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 함급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보다 콤팩트하고 낮은 상부 구조물을 갖추었으며, 리벳 대신 용접되었다.[2] 중량 제한 내에서 10기의 보일러만 장착할 수 있었고(이전의 다카오급과 묘코급에는 12기가 장착됨), 굴뚝 배열 역시 중량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었다. 중앙 굴뚝은 자체 굴뚝이 없었으며, 대신 배기 가스를 앞쪽 굴뚝 아래로 배출했다. 앞쪽 굴뚝 자체는 바닥에서 기울어져 꼭대기에서 뒤쪽 굴뚝과 합쳐졌다. 새로운 기어드 충동 터빈은 '아타고'보다 22000shp를 추가하여 최대 속도를 1.5kn 증가시켰다.
공표된 배수량은 8,500톤이었지만, 실제 설계 배수량은 9,500톤이었으며, 시험에서 11,169톤을 배수했다.[3] 그러나 설계자들은 과도하게 욕심을 부려, 과도한 상부 중량으로 인해 불안정성이 발생했고, 사격 시험에서 선체 용접에 균열이 발생했다. '모가미'와 '미쿠마'에는 선체 팽창부가 개조되었고, '쿠마노'와 '스즈야'에도 추가되어 폭이 20.5m로 증가했으며 배수량은 11,200톤으로 증가하여 속도가 2kn 감소했다.[5]
일본이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탈퇴한 후, 전체 함대를 현대화하고 확장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1939년부터 이 함급은 대대적인 재건을 위해 투입되어 3연장 155mm 포탑이 203mm (8인치) 포 2연장 포탑으로 교체되었고, 155mm 포탑은 전함 야마토급에 사용되었다.[6] 어뢰 벌지도 추가되었다. 총 배수량은 13,000톤 이상으로 증가했고, 속도는 35kn로 감소했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는 중순양함 이하의 보조 함정에도 세부적인 제한이 가해져, 순양함도 2가지 종류로 분류되었다. 중순양함 보유 쿼터가 다카오급으로 상한에 도달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보유 쿼터가 남아있는 경순양함으로 중순양함과 동등한 공격력을 가진 함정을 원했다.
경순양함(카테고리 b)으로 분류되는 조건은 "배수량 1만 톤 이하", "주포 6.1인치(15.5cm) 이하"였으며, 조약에서 인정된 일본의 건조 쿼터 잔여량은 50,955톤이었다. 쇼와 6년도(1931년) "제1차 보충 계획"에서 기준 배수량 8,500톤의 경순양함 4척을 건조하기로 결정했으며, 여러 외국이나[10] 국내에서도 모가미형은 "경순양함"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앞서 언급한 조건에 맞도록 주포는 경순양함 제한의 최대 구경인 15.5cm로 하였지만, 실제 배수량은 1만 톤 이상이었으며, 조약 효력 상실 후 20.3cm 연장포로 환장이 가능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모가미형은 조약의 실효를 예상하고 설계되었으며, 20.3cm 연장 포탑으로 교체하는 것을 고려한 선체에 신설계 15.5cm 3연장 포탑을 탑재한 경순양함으로 준공되었다. 조약 실효 후, 계획대로 주포를 교체하여 중순양함이 되었지만 서류상으로는 경순양함으로 남아 있었다.
3. 건조
중량을 줄이고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모가미'급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작고 낮은 상부 구조물을 갖추었고, 리벳 대신 용접을 사용했다.[2] 중량 제한 내에서 10기의 보일러만 장착할 수 있었고, 굴뚝 배열 역시 중량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설계 과정에서 과도한 욕심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상부 중량 증가로 불안정성이 발생했고, 사격 시험에서 선체 용접에 균열이 생겼다. 이에 '모가미'와 '미쿠마'는 선체 팽창부를 개조했고, '스즈야'와 '구마노'에도 추가하여 폭이 20.5m로 증가하고 배수량이 11,200톤으로 늘어나 속도가 감소했다.[5]
일본이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탈퇴한 후, 1939년부터 '모가미'급은 대대적인 재건을 거쳐 3연장 155mm 포탑이 203mm (8인치) 포 2연장 포탑으로 교체되었다. 155mm 포탑은 전함 야마토급에 사용되었다.[6] 어뢰 벌지도 추가되어 총 배수량은 13,000톤 이상으로 증가했고, 속도는 감소했다.
1931년(쇼와 6년) 1번함 모가미와 2번함 미쿠마가 기공되었다. 1934년 도모즈루 사건으로 복원력 부족이 드러나자, 건조 중이던 3번함 스즈야와 4번함 구마노는 설계를 변경하여 건조되었다. 1935년 모가미는 완성 전 시험에서 선체 뒤틀림, 포탑 선회 문제, 침수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개장 공사를 받았다. 준공 직후 제4함대 사건으로 선체 강도 부족이 드러나, 모가미급 4척 모두 선체 강도 강화 공사를 받았다. 이 공사들로 인해 모가미급 4척이 모두 함대에 배치된 것은 계획보다 2년 늦은 1938년(쇼와 13년)이었다.이름 한자 건조사 기공 진수 완료 최후 모가미 最上|모가미일본어 구레 해군 공창 1931년 10월 27일 1934년 3월 14일 1935년 7월 28일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심각한 전투 피해를 입은 후 자침, 1944년 10월 25일 미쿠마 三隈|미쿠마일본어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1931년 12월 24일 1934년 5월 31일 1935년 8월 29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격침, 1942년 6월 6일 스즈야 鈴谷|스즈야일본어 요코스카 해군 공창 1933년 12월 11일 1934년 11월 20일 1937년 10월 31일 사마르 해전에서 격침, 1944년 10월 25일 구마노 熊野|구마노일본어 고베-가와사키 조선소 1934년 4월 5일 1936년 10월 15일 1937년 10월 31일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 항공기에 의해 격침, 1944년 11월 25일
3. 1. 스즈야형
모가미급 3번함 스즈야와 4번함 구마노는 선체 설계가 개선되어, 이전의 모가미 및 미쿠마와는 선체 형태에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후기 2척은 스즈야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앞선 2척의 보일러는 중유 전소식 대형 8기, 소형 2기의 총 10기였지만, 스즈야형에서는 중유 전소식 대형 8기로 변경되었다. 이로 인해 모가미와 미쿠마에는 제3 포탑과 함교 구조물 사이에 대형 흡기 트렁크가 설치되었지만, 스즈야형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1번 굴뚝도 스즈야형에서는 보일러 감소에 따라 직경이 가늘어졌다.
4. 설계
1931년 함대 보충 계획에 따라 일본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순양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모가미'급은 5문의 3연장 포탑에 155mm 주포를 탑재하고, 55° 앙각으로 고각포를 갖춘 몇 안 되는 순양함이 되었다. 재장전 가능한 포탑식 어뢰 발사기와 강력한 대공전 방어력도 갖추었다.[1]
중량과 안정성을 고려하여 '모가미'급은 알루미늄 상부 구조물을 사용하고, 리벳 대신 용접을 적용했다.[2] 10기의 보일러와 새로운 기어드 충동 터빈을 장착하여 최대 속도를 높였다. 방어력 또한 준수하여 상당한 피해를 견딜 수 있었다. 공표된 배수량은 8,500톤이었지만, 실제 설계 배수량은 9,500톤, 시험에서는 11,169톤이었다.[3]
그러나 과도한 상부 중량으로 불안정성이 발생했고, 사격 시험에서 선체 용접 균열이 발견되었다. '모가미'와 '미쿠마'는 선체 팽창부를 개조했고, '쿠마노'와 '스즈야'에도 추가하여 폭이 증가하고 배수량이 11,200톤으로 늘면서 속도가 감소했다.[5]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 탈퇴 후, 1939년부터 '모가미'급은 대대적인 재건을 거쳐 3연장 155mm 포탑을 203mm (8인치) 포 2연장 포탑으로 교체하고,[6] 어뢰 벌지를 추가했다. 총 배수량은 13,000톤 이상으로 증가했고, 속도는 감소했다.
미국 해군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은 '모가미'급에 대항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되었으며, 개조 전 '모가미'급과 매우 유사한 무장을 갖추었다.
텐류급 경순양함 ("텐류", "타츠타") 및 5500톤급 경순양함 ("쿠마", "타마") 대체함으로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쿠마노" 건조 예산이 승인되었다.[9] 모가미형은 20.3cm 연장 포탑 교체를 고려한 선체에 15.5cm 3연장 포탑을 탑재한 경순양함으로 건조되었고, 조약 실효 후 주포를 교체하여 중순양함이 되었지만 서류상으로는 경순양함으로 남았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는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의 주포 크기와 배수량 상한이 정해졌고,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는 중순양함 이하 보조 함정에도 제한이 가해져 순양함이 두 종류로 분류되었다. 일본 해군은 경순양함으로 중순양함과 동등한 공격력을 가진 함정을 원했다.
쇼와 6년(1931년) "제1차 보충 계획"에서 기준 배수량 8,500톤 경순양함 4척 건조가 결정되었고, 국내외에 모가미형은 "경순양함"으로 발표되었다.[10] 실제 배수량은 1만 톤 이상이었으며, 조약 실효 후 20.3cm 연장포 환장이 가능했다.
모가미형 원안 "C37" 계획에서는 다카오형 수준의 대형 함교가 계획되었으나 준공 시에는 소형화되었다. 또한, 제국 해군 전투 함정 최초로 3단식 철제 침대가 전면 채용되었다.[11]
1931년 1번함 모가미와 2번함 미쿠마가 기공되었다. 1934년 도모즈루 사건으로 복원력 부족이 판명되어 개장 공사가 실시되었고, 건조 전후였던 3번함 스즈야와 4번함 구마노는 설계를 변경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
1935년 모가미는 완성 전 공시에서 선체 뒤틀림으로 인한 포탑 선회 문제, 용접부 침수 등 문제로 개정 공사를 했다. 준공 직후 쇼와 10년(1935년) 함대 대연습에서는 태풍으로 인한 파랑으로 선체 강도 부족이 드러나(제4함대 사건) 모가미형 각 함도 선체 강화 공사를 실시했다. 이러한 공사로 모가미형 4척이 함대에 배치된 것은 계획보다 2년 늦은 쇼와 13년(1938년)이었다.
4. 1. 주포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일본 해군은 보유 톤수가 남아있는 경순양함으로 분류하여 건조하기 위해 15.5cm 3연장포를 채택했다.[1] 기준 배수량 8,500톤도 조약에 따른 요구 사양이었지만, 15.5cm 3연장포는 중순양함의 20.3cm 연장포보다 무거워 처음부터 무리가 있는 요구였으며, 실제 배수량은 이를 대폭 초과했다.
이전 중순양함들은 2번 포탑을 배 뒷부분 높은 곳에 배치했지만, 모가미급에서는 3번 포탑을 높은 곳에 배치했다. 2번 포탑을 높게 배치하면 앞쪽의 3개 포탑을 가까이 배치할 수 있어 전체 중량을 줄일 수 있지만, 3번 포탑이 2번 포탑과 함교 사이에 놓여 사격 각도가 매우 작아진다. 모가미급과 같은 배치에서는 1번 포탑과 2번 포탑의 간격이 벌어지지만, 15.5cm 포는 20.3cm 포보다 포신이 짧아 간격을 크게 넓히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15.5cm 3연장포는 포탄 1발당 위력은 떨어지지만, 단위 시간당 발사하는 포탄 총 중량은 20.3cm 연장포보다 우수하여, 실제 사용 부대에서의 평판이 매우 좋았다.
1936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과 런던 군축 조약의 효력이 없어지고 군축 시대는 막을 내렸다. 모가미급 각 함은 당초 예정대로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주포를 20.3cm 연장포로 교체하는 공사를 실시했다.[6] 이 주포 교체 사실은 은폐되었고, 미군이 이를 알게 된 것은 미드웨이 해전 때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직전에 알았다. 이 개조로 포신이 길어져 2번 포는 배 앞부분이 1번 포탑에 겹쳐, 각도를 주지 않으면 앞쪽을 향할 수 없게 되었다.
제거된 15.5cm 포의 포신은 경순양함 오요도의 주포나 야마토급 전함 2척의 부포로 재이용되었고, 육상 설치 고사포로도 사용되었다.
4. 2. 방공 순양함으로의 개장 계획
모가미와 미쿠마 2척을 방공 순양함으로 개장하는 계획은 스즈야 건조 계획 당시에 나왔다.[13]개장 내용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정보만 남아있고, 시안 도면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후쿠이 시즈오의 기술에 따르면 주포탑 일부 또는 전부를 철거하고 12.7cm 연장 고각포를 주력으로 하는 장비안이 검토되었다고 한다.[13]
그 외에도, 도모즈루 사건의 영향으로 스즈야형을 개설계할 때, 스즈야와 구마노를 방공 순양함으로 개장하는 계획[14]이나, 모가미형 전부를 방공 순양함으로 개장하는 계획[15]이 있었다는 기술도 존재한다.
5. 함생
모가미급 중순양함은 일본 제국 해군이 건조한 중순양함으로, 총 4척이 건조되었다. 이 함선들은 태평양 전쟁 초기에 남방 작전에 투입되어 일본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1942년 3월 1일 바타비아 해전에서는 모가미와 미쿠마가 미 해군 중순양함 휴스턴과 호주 해군 경순양함 퍼스를 격침시켰다. 또한, 통상 파괴 작전에도 참여하여 여러 척의 상선을 격침시켰으며, 세이론 해전에는 4척 모두 참가했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만 해전 등 태평양 전쟁의 주요 해전에 참전하였으나, 종전까지 모두 침몰했다.
5. 1.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이세 만에서 촬영된 ''구마노''(전경), ''미쿠마''(중앙) 및 ''스즈야''.
모가미급 4척은 모두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에 참여했다. ''모가미''와 ''미쿠마''는 순다 해협 해전에 참전하여 영국 왕립해군 순양함 와 미 해군 순양함 의 격침에 기여했다.[1]
1942년 6월, 4척 모두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잠수함 공격을 피하려다 ''모가미''와 ''미쿠마''가 충돌했다. ''미쿠마''는 1942년 6월 6일, 항공모함 와 에서 발진한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1] 심하게 손상된 ''모가미''는 간신히 귀환하여 10개월 동안 수리를 받았으며, 이 기간 동안 함미 부분이 완전히 재건되었고, "X" 및 "Y" 포탑은 비행 갑판으로 교체되었다(11대의 항공기를 운용할 의도).[1]
1944년 10월, 생존한 함선들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다시 만났다. 순양함 와의 충돌, 순양함의 함포 사격, 그리고 공습으로 심하게 손상된 ''모가미''는 구축함 에 의해 자침되었고,[1] ''구마노''는 보일러 하나로 간신히 마닐라 항구로 들어갔지만, 1944년 11월 25일 윌리엄 F. 핼시의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1] 미국 호위 항공모함 소속 항공기는 레이테에서 ''스즈야''를 심하게 공격했고, 10월 25일 구축함 에 의해 자침되었다.[1]
모가미급 중순양함 4척은 제7전대를 편성하여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개전 초에는 남방 작전을 지원했다. 란령 작전에도 종사하여 일본군의 초전 승리에 기여했다.[2] 1942년 3월 1일 바타비아 해전에서는 ''모가미''와 ''미쿠마''가 공동으로 미 중순양함 휴스턴 및 호주 왕립해군 경순양함 퍼스를 격침하는 활약을 보였다.[2] 또한 통상 파괴 작전에서도 여러 척의 상선을 격침시켰다.[2]
세이론 해전에는 4척이 모두 참가했다.[2]
미드웨이 해전에도 4척이 모두 참가했지만, 미드웨이 섬에서 퇴피하던 중 ''모가미''와 ''미쿠마''가 충돌하여 ''모가미''는 함수를 잃었다. 그 후 공습으로 ''모가미''는 대파, ''미쿠마''는 침몰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미쿠마''는 일본 중순양함 최초의 손실이었다.[2] ''모가미''는 손상 수리 시 후부 포탑을 철거하고 비행 갑판을 연장하여 수정 11기 탑재 가능한 항공 순양함이 되었다.[2]
''구마노''와 ''스즈야''는 인도양에서의 통상 파괴 작전에 종사할 예정이었지만, 미군의 과달카날 섬 상륙으로 인해 급거 솔로몬 제도에 진출했다. 제2차 솔로몬 해전, 남태평양 해전, 제3차 솔로몬 해전, 헨더슨 비행장 함포 사격에 잇따라 대해전에 참가했다.[2] 그 후, ''스즈야''와 ''모가미''는 1943년 11월 라바울 공습으로 손해를 입었다.[2]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는 ''모가미'', ''스즈야'', ''구마노'' 3척 모두 참가했다. ''구마노'' 탑재기가 적 기동 부대를 발견했다.[2]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모가미''는 니시무라 함대에 소속되어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 참가했지만 적 포격으로 대파, 더욱이 퇴피 중 공습으로 항행 불능이 되었기 때문에 자침 처분되었다. 구리타 함대에 소속된 ''스즈야''는 사마르 해전에서 미군기의 공격으로 화재가 발생, 탑재 어뢰가 유폭하여 침몰했다.[2]
같은 사마르 해전에서 ''구마노''는 함수에 적 어뢰가 명중, 속도 저하로 인해 단함으로 코론 만 경유 마닐라를 향해 퇴피했다. 도중 거듭된 공습으로 피해가 발생했지만 마닐라에 도착, 응급 수리를 실시했다. 본격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향해 출항했지만 미 잠수함의 어뢰 명중, 항행 불능. 다시 응급 수리로 항행 가능하게 되었지만 1944년 11월 25일, 산타크루즈 만에서 미 항모기의 공습으로 전복 침몰했다.[2]
''구마노''를 마지막으로 모가미형은 모두 전몰했다.[2]
6. 함선 목록
이름 | 한자 | 하위 분류 | 건조사 | 기공 | 진수 | 완공 | 최후 |
---|---|---|---|---|---|---|---|
모가미 | 最上|모가미일본어 | 모가미 | 구레 해군공창 | 1931년 10월 27일 | 1934년 3월 14일 | 1935년 7월 28일 | 수리가오 해협 전투 이후 자침, 1944년 10월 25일 |
미쿠마 | 三隈|미쿠마일본어 |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 1931년 12월 24일 | 1934년 5월 31일 | 1935년 8월 29일 |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 1942년 6월 6일 | |
스즈야 | 鈴谷|스즈야일본어 | 스즈야 | 요코스카 해군공창 | 1933년 12월 11일 | 1934년 11월 20일 | 1937년 10월 31일 | 사마르 해전에서 침몰, 1944년 10월 25일 |
구마노 | 熊野|구마노일본어 | 가와사키 고베 조선소 | 1934년 4월 5일 | 1936년 10월 15일 | 1937년 10월 31일 | 필리핀 전역에서 타이콘데로가의 함재기에 의해 침몰, 1944년 11월 25일 |
참조
[1]
서적
Lacroix, pp. 434–435
[2]
서적
Lacroix, pp. 438–439
[3]
서적
Brown, p. 74
[4]
웹사이트
Mogami class cruisers (1934)
https://naval-encycl[...]
2023-11-02
[5]
서적
Lacroix, pp. 439–442
[6]
서적
Lacroix, pp. 442–443
[7]
문서
昭和10年1月30日付 海軍内令 第29号改正、海軍定員令「第50表ノ2 二等巡洋艦定員表 其ノ5」。この数字は飛行科要員を含み特修兵を含まない。
[8]
문서
昭和12年4月23日付 海軍内令 第169号改正(昭和12年6月1日施行)、海軍定員令「第48表 二等巡洋艦定員表 其ノ4」。この数字は飛行科要員を含み特修兵を含まない。
[9]
문서
「昭和9年度海軍予算査定資料」p.15
[10]
문서
「第3501号 6.10.27 最上」p.2
[11]
문서
「2 帝国海軍造艦術進歩の現状」p.6
[12]
문서
「第171号の13 10.10.18 筑摩」p.2
[13]
서적
『日本巡洋艦物語』p.260及びp.341
[14]
서적
『未完成艦名鑑 1906~45』p.108
[15]
서적
『日本駆逐艦物語』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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